📑 목차
글을 쓰지 못하고 화면만 바라봤던 하루를 기록한다. 쓰지 못했던 날의 기억을 통해 글쓰기의 의미와 침묵의 시간, 기록이 멈춘 순간이 오히려 일상과 감정을 어떻게 드러냈는지를 차분히 돌아본다.
쓰지 못했던 날의 기억이 시작된 순간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하루를 기록하는 일을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매일 무엇을 쓸지 고민하면서도, 결국에는 몇 문장이라도 남길 수 있었다. 잘 쓴 글이 아니어도 괜찮았고, 길지 않아도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는 감각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는 행위는 점점 일상의 일부가 되었고, 특별한 결심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런 흐름 속에서 맞이한 어느 날, 나는 아무 말도 쓰지 못한 채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은 특별히 바쁜 날도 아니었고, 감정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던 날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무엇을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키보드 앞에 앉아 화면을 켜두고, 커서가 깜빡이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손은 키보드 위에 올려져 있었지만, 어떤 문장도 시작되지 않았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다는 감각보다, 쓰고 싶은 말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 상태에 가까웠다. 그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고, 그 시간 동안 나는 화면과 나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급함이 들었다. 매일 기록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오늘은 왜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쓰지 못하는 이유를 찾으려 애썼지만,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피곤해서인지, 집중이 안 돼서인지, 아니면 그냥 쓰기 싫은 날이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무 말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 분명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이전 같았으면 이런 날을 실패한 날로 규정했을 것이다. 기록을 건너뛴 날, 흐름이 끊긴 날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쓰기를 이어오며 조금 달라진 점은, 이 멈춤을 바로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쓰지 못했던 날의 기억은 그날의 나를 드러내는 또 다른 형태의 기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만 바라봤던 그 시간 역시 하루의 일부였고,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화면만 바라보며 드러난 감정의 정체
아무 말도 쓰지 못하고 화면만 바라보고 있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생각보다 많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였지만, 마음속에서는 여러 감정이 겹쳐 있었다. 답답함, 막막함, 약간의 불안이 뒤섞여 있었고, 그 감정들은 쉽게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글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곧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날의 감정이 분명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옮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보통은 기록을 통해 감정을 확인했는데, 그날은 기록이 멈추자 감정도 함께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 더 오래 그 상태에 머물러 보니,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표현되지 않고 있다는 쪽에 가까웠다. 말로 만들기 전 단계의 감정들이 마음속에 머물고 있었다.
화면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쓰지 못한 그 시간은, 감정이 언어로 바뀌는 과정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모든 감정이 즉시 문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어떤 감정은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의 나는 감정을 정리할 여유도, 설명할 힘도 부족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자, 쓰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감정이 바로 기록되지 않는 날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감정은 언제나 말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고, 때로는 침묵 속에 머무는 것을 선택하기도 했다. 쓰지 못했던 날의 기억은 감정이 반드시 표현되어야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조용히 알려주었다. 화면만 바라봤던 그 시간은 감정의 공백이 아니라, 감정이 쉬고 있던 시간에 가까웠다.
쓰지 못했던 날이 기록의 기준을 바꾸다
아무 말도 쓰지 못한 날 이후로, 나는 기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기록은 무엇인가를 남기는 행위라고 믿어왔지만, 그날의 경험은 기록의 정의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기록하지 못한 날도 분명 기록의 일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날의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기록의 기준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이전에는 매일 일정한 분량이나 형식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이제는 그런 기준이 크게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어떤 날은 많은 말을 남길 수 있고, 어떤 날은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기록은 연속성을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일상을 동반하는 행위라는 인식이 생겼다.
쓰지 못했던 날은 오히려 이후의 기록을 더 솔직하게 만들었다. 글이 잘 나오는 날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막히는 날, 멈춘 날,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 날까지 포함해 기록의 범위가 넓어졌다. 그 덕분에 기록은 더 현실적인 모습이 되었고, 나의 일상 역시 있는 그대로 남게 되었다. 기록을 통해 완성된 나를 보여주려는 마음도 줄어들었다.
이제는 글을 쓰지 못하는 날이 와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날을 실패로 규정하지 않고, 하나의 상태로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쓰지 못했던 날의 기억은 기록을 중단하게 만든 경험이 아니라, 기록을 더 오래 이어갈 수 있게 만든 경험으로 남았다. 기록은 언제나 말이 많을 필요가 없었고, 때로는 침묵을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쓰지 못했던 날이 남긴 조용한 변화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아무 말도 쓰지 못하고 화면만 바라봤던 그 하루는 나에게 꽤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날 이후로 글쓰기는 더 이상 성과를 남기기 위한 행위가 아니게 되었다. 무엇을 써야 한다는 압박 대신, 지금의 상태를 인정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쓰지 못하는 날에도 기록은 이어지고 있었고, 다만 형태가 달랐을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변화는 일상 전반에도 영향을 주었다. 모든 날을 생산적으로 채우지 않아도 괜찮다는 감각이 생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불안도 줄어들었다. 쓰지 못했던 날을 통과하며, 나는 멈춤과 공백을 이전보다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날의 침묵은 나를 멈추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을 고르게 해주었다.
지금도 가끔은 아무 말도 쓰지 못하는 날이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예전처럼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는다. 화면만 바라보고 있는 시간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록은 반드시 문장으로만 이루어질 필요가 없었고, 기록의 바탕에는 언제나 하루를 살아낸 나 자신이 있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달라진 나의 일상 기록 속에서, 쓰지 못했던 날의 기억은 가장 조용하지만 깊이 남은 장면이다. 그날의 침묵은 기록의 끝이 아니라, 기록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아무 말도 쓰지 못했던 하루는 지금도 나에게 말한다. 기록은 말이 없을 때조차,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쓰지 못했던 날 이후, 글쓰기를 대하는 마음의 변화
쓰지 못했던 하루를 지나고 나서 나는 글쓰기를 대하는 마음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줄어들었고, 대신 글을 쓸 수 있을 때 쓰면 된다는 여유가 생겼다. 이 여유는 글쓰기 자체를 가볍게 만들었고, 다시 글 앞에 앉는 일을 덜 두렵게 했다. 예전에는 글이 막히면 스스로를 의심했지만, 이제는 그런 날도 자연스러운 흐름의 일부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쓰지 못했던 날은 글쓰기를 멈추게 한 사건이 아니라, 글쓰기를 오래 이어가기 위한 기준을 다시 세워준 계기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보다, 글 앞에 다시 앉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기록은 매일 완성되는 결과가 아니라,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자리라는 사실을 그 하루가 조용히 가르쳐주었다.이 변화 이후로 나는 글쓰기를 대할 때 결과보다 상태를 먼저 살피게 되었다. 오늘 무엇을 써야 하는지가 아니라, 지금 어떤 상태인지가 더 중요해졌다. 쓰고 싶은 말이 없다는 사실도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신호를 무시하지 않으려 했다. 글이 나오지 않는 날은 아무 일도 없는 날이 아니라, 내 안에서 무언가가 정리 중인 날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글을 쓰지 못하는 시간도 불필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록은 언제나 문장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과 멈춤까지 포함해 완성된다는 사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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